민족성에 대한 이해를 올바로 이해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는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의 개념과 상치되는 개념이 아니며, 민족 고유의 상대성과 주체성을 올바로 세워나가는 것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근대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일제하 문화운동에
1.서론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로서 식민지 시기의 반민족적 범죄와 유산을 청산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유럽 국가들도 나치에 협력한 자들의 문제를 일찍이 해결하였고, 북쪽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은 국가 수립과 함께 해결되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독립과 국가
민족운동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이념상에서는 사회주의, 아나키즘이 새로이 수용되었고, 노선 상에서는 무장투쟁론, 외교운동론, 문화운동론, 자치운동론, 정치투쟁론이 나타났다. 이 가운데 주로 국내에서 전개된 ‘문화운동론’ 과 ‘자치운동론’을 흔히 ‘민족개량주의’ 라고 부
민족개량화기라 할 수 있다. 전국적인 3․1운동의 발발로 일제의 무단적 통치 방식은 한계에 이르렀고, 이에 일제는 통치방식을 민족분열정책방식으로 변화해갔다. 보통경찰제로의 전환, 조선어 신문발간 허가, 집회․결사의 자유 일부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친일파를 양성․회유하여 민족적
민족개량주의 세력의 정치운동
① 첫 번째 자치운동(1923~1924)
-천도교 신파의 최린, 동아일보사의 김성수와 송진우 등에 의하여 추진
-이광수 [민족적 경륜]을 통해 자치운동의 필요성 강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
② 두 번째 자치운동(1925~1927)
-천도교 신
민족분열을 획책하였으며, 그것은 분단의 지향, 곧 단정운동으로 나타났다.
단정운동이 극우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된 것은 해방된 해 연말에 일어난 반탁운동을 통해서였다. 해방 직후는 미군정을 제외한다면 남한은 좌익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우익 특히 극우는 그 성질상 친일파, 민족개량주
반민특위가 친일경찰의 습격을 받고 와해된 지 55년 만에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한 제2의 반민법의 개정이 또다시 논의되고 있다.
혹자들은 왜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느냐 하고 시대 착오인 발상 이다 혹은 ‘친일파 청산’을 빌미로 야당 정치인을
민족개량주의노선이라는 비판적인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친일이라는 결과로 실력양성론 전체를 한정지음과 동시에 실력양성론의 다양함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우리는 본 연구를 통해 윤치호에 대한 기존의 가치 판단이 개입된 시각에서 벗어나 그의 실력양성론을 초기부
이광수의 연도별 친일행각
1919년 이전
1919 ~ 1921년
1921 ~ 1937년
1937년
1939년 이후
제 1단계
임시정부에서
2년 동안의
독립운동
제 2단계
수양동우회 사건
제 3단계
통치권자에 대한 관념적인 협력정신
민족개량주의, 문화주의의 실현을 주장
의례준칙의 일본화, 생활방식의 일본화